“증오보다 사랑이 전쟁보다 평화가 아름답다.” 헤르만 헤세가 아니라면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는 말의 향연이다. 문제는 과연 무엇이 평화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있다.

1910년 8월 29일의 서울은 너무도 평온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한반도 전체가. 오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자체가 완전히 소멸된 그날의 평온함을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우리는 진정 그날 전쟁이 아닌 평화를 택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전쟁보다 아름답다 얘기할 수 있는가. 나라를 잃어서보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나라를 잃게 되는 과정이다.

세계 그 어떤 문명국도 이처럼 평화롭게 나라를 잃진 않았다. 거짓된 평화를 위해 전쟁을 포기하는 것은 노예상태의 자발적 수용과 다름없음을 이보다 더 웅변해준 것도 없다.

하노이에 갔을 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 하나는 오만해 보이는 베트남인의 인상이었다. 그들의 오만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호치민 박물관 로비에는 거대한 지도가 놓여 있었다. 그들이 지도를 놓고서 하고자 한 얘기의 핵심은 흔히 남지나해로 부르는 지역 섬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분쟁대상은 바로 중국이다. 베트남에게 중국은 사회주의 우방일까. 답은 ‘아니다’이다.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전쟁의 역사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곧바로 세계최강 미국과 기나긴 전쟁을 치러야했다.

수없이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들은 결국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을 안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번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오랜 숙적 중국의 침략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9년 중국과의 전쟁이다.

당시 등소평의 중국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그것을 응징한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하지만 실상은 중국이 지원하는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의 베트남 침공에 대한 자위권 차원의 대응이었다.

30개 사단 60만명의 중국군이 베트남을 침공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중국이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래 전 징기스칸의 군대를 그리고 현대에 와선 프랑스와 미국을 굴복시킨 저력의 인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역시 앞선 그들처럼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철수해야 했다.

G2로 얘기되는 중국이 과연 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이다.

적어도 패권국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선 힘에 걸맞은 책임과 절제가 필요한데 현재 중국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흔히 남지나해로 불리는 지역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지역 골목대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에 강한 불쾌감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베트남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이 베트남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일개 삼류급 대사가 주재국을 향해 막말 수준의 협박을 늘어놓은 한국 상황과 많이 다르다.

중국은 자신들은 북핵문제에 책임이 없고 미국과 한국의 대응에 문제가 있다고 얘기한다.

싸드를 배치하면 한국에 핵공격도 할 수 있다는 논리는 최소한의 금도도 보이지 않는다.

만일, 중국이 싸드 배치가 그토록 싫고 북핵문제 해결도 원치 않는다면 한국의 핵무장에 동의하면 된다. 한국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중국보다 훨씬 완벽하게 핵무기를 통제할 수 있다.

미국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도널드 트럼프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한국이 미국에 기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의 말처럼 한국이 핵무장하고 미군도 철수하면 미국의 비용부담이 없어질 테니 참으로 미국 국익에도 부합한다. ‘태프트-카쓰라 밀약’으로 조선을 버린 미국이 스스로 그렇게 얘기한다면 굳이 미군을 잡을 필요 없다. 그것은 곧 한국의 핵무장을 정당화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적잖은 사람들이 김부식과 조선의 사대주의를 비판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현 상황의 해결에 대해선 그들이 비판한 이상으로 중국의 눈치를 살핀다. 한국은 중국과 떨어져 살 수 없다고(?).

베트남인들이 평화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토록 오랜 전쟁을 치렀다고 생각하는가.

진정한 평화를 쟁취한 것은 바로 그들 베트남인이다.

장상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