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타인을 통해 나이를 실감한다.

진경준, 나향욱 그리고 김형준이 내게 깨우쳐준 것도 그렇다.

진경준 86, 나향욱 87 그리고 김형준이 89학번이라고 하니 내 학창시절이 정말 오랜 옛이야기임을 새삼 실감한다.

1987년 6.10 항쟁이 있던 그 해, 내가 다니던 전북대 중앙도서관 앞에도 수많은 학우들이 땡볕아래 모였다.

그런데 의기에 충만해 있던 그 순간에도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묵묵히 학업에 몰두하던 학우들은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을 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도서관 학우들의 동참을 촉구하는 목소리에 대한 작지만 의미 있는 한마디였다.

“학우 여러분.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 역할을 하듯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학우들의 모습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합니다. 역사에도 역할 분담은 존재하니까요.”

그곳에 있던 그 누구도 그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 시간 도서관에서 책을 보던 그들은 또 다른 소임을 가진 존재였다. 그들이 그 시간 성취한 학업은 그 개인만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

때문에 그들이 얻은 성취의 열매는 사회와 그 구성원에 의해 공유됨은 물론 마땅히 공동체에 환원돼야 할 공공재이기도 하다.

그 엄혹한 시기 나는 고사동 파출소가 화염병에 불타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누군가 화염병을 던지려 할 때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외쳤다. “안돼. 파출소에 사람이 있다. 먼저 안에 있는 사람 모두 대피시켜.”그 급박하고 흥분된 상태에서도 그들은 지켜야 할 바를 결코 잊지 않았다.

6.10항쟁이 결코 폭동이 아님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안에 있던 경찰이 모두 나온 후 파출소는 불에 탔다. 이것은 대단히 예외적 상황이다.

그것은 더 이상 한국사에 ‘독립운동’을 필요로 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권력에 대한 존중은 그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 대한 여러 진단이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누리는 민주화는 그 과거의 시간에 연원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언필칭 386세대가 존재한다.

어느덧 그 시절은 과거가 되고 그 주역들은 기득권 세력이 됐다.

1996년 검사 진경준은 사회에 준엄한 경종을 울리기 위해 한 사람을 구속한다.

당시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구속된 사람은 6천원짜리 통일호 열차표를 1만원에 팔아 부당이득 4천원을 챙긴 암표상이었다.

진경준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암표 판매행위는 피서객이나 귀향객들의 심리를 악용해 부당이득을 올리는 나쁜 범죄로 휴가철을 앞두고 암표상들에게 경종을 올리기 위해 구속했다.” 20년 후 그가 챙긴 부당이득은 120억원이다.

나향욱은 어떠한가. 나는 그가 경향신문 정책사회부장에게 하고자 했던 진의를 이해한다.

그가 바라 본 이 사회는 원천적으로 평등할 수도 평등해서도 안 되는 사회다. 그것을 이해 못하는 대중들이 그에게 개, 돼지로 보인다한들 크게 어색해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그가 그런 사람들이 주는 녹을 받는 존재였다는데 있다. 이제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바로 막내 얘기다.

2013년 국회법사위 국정감사장에서 김형준은‘전두환 추징금’특별환수팀장 자격으로 의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자의 제자 중에 유자라는 분이 있습니다. 유자의 이야기 중에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과 원칙, 기본을 세워서 길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번 특별환수팀의 업무가 법과 원칙을 바로 세워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길을 만드는 업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가 고등학교 동창생과 보여준 드라마는 아주 흥미진진했다.

언필칭 서로에 대한 우정이 배신과 음모로 변환되는 장면에선 영화보다 더한 짜릿함과 반전이 존재했으니. 진경준, 나향욱 그리고 김형준은 87년 그해 여름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앎이 부족한 나는 김형준을 통해 배웠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을 세워서 길을 만든다.

쉽게 들리지만 결코 자신할 수 없는 얘기다. 언제나 어려운 것은 기본이기 때문이다.

장상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