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귀촌하여 살고 있는 지역 면장님께서 군청 모 과장님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셔서 주민들에게 존경받는 분이셨다. 그분께서 군 보육심의위원으로 봉사해달라고 전화를 하셨다. 보육과 관련하여 문외한이고 시간적으로 여유롭지 않아 처음에는 정중하게 사절하였다. 그런데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셔서 한없이 튕길 수가 없었다.

며칠 전 회의가 있어 참석했다. 어린이집 수급인원 조정 건과 농촌지역 특례법에 따라 어린이 수가 29명 이내인 시설에 대해 원장이 교사를 겸직하도록 하는 법안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두 건에 대해 참석한 위원들이 별 이견 없이 통과시켰다. 이밖에 공립어린이집 원장을 심사하는 안건이 있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하기 전까지 몇몇 지인이 내가 보육심의위원으로 위촉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했다.

처음엔 왜 전화를 했는지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회의 자료를 보고서야 전화내용이 은근히 청탁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어린이보육시설 원장을 이런저런 인연이 닿은 연줄로 뽑으면 공정성을 잃을 뿐만 아니라 보육에 대한 질이 떨어질 게 뻔하다. 심사를 하기 전에 신청자와 전혀 연관이 없다는 확인서를 썼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미흡하다고 생각했다. 신청자가 프리젠테이션을 하기 전에 발언권을 얻어 개인적으로 신청자와 인연이 있는 사람은 자진 퇴실하자고 건의했다.

다행스럽게 한 사람도 퇴실하는 사람이 없었다. 두 신청자가 발표하는 내용과 제출한 서류를 보고 판단한 결과 공교롭게도 나에게 전화한 사람들이 거론한 신청자가 다른 신청자에 비해 모든 항목에서 우월하였다. 내게 전화를 건 사람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점수가 엇비슷하면 괘씸죄를 엮어서 다른 신청자 손을 들어주려 했던 다짐이 뒤집어져버렸다. 신청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박사학위를 소지하였고 한 사람은 박사과정을 수료한 지식인이었다.

이 세상을 호주머니 뒤집듯이 발려놓고 보면 이뿐이겠는가. 우리사회 어느 곳 할 것 없이 구석구석 그릇된 연고주의가 걷히지 않는 안개처럼 자욱하게 끼어 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이 사회한 구석에 쳐 박힌 안개 같은 존재이다. 오래 전 일이다. 큰아들이 시골 중학교에 다니다 시내에 있는 학교로 전학했다. 이 때 지인에게 학교배정을 내 입맛에 맞게 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다. 이 밖에 딱히 떠오르지 않아 기억하지 못할 뿐 이런 저런 부탁을 수 없이 했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비양심적이고 파렴치한 것일 뿐 아니라 사회질서와 정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어찌 보면 청탁공화국이다. 자신이 직접 아는 사람이 없으면 어떤 절차나 규정, 법을 무시하고 몇 사람을 건너뛰어서라도 사람을 붙잡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떳떳하지 못한 거래를 하기도 한다. 부탁할 사람이나 돈이 없는 대다수 사람은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오히려 무능력하고 바보스럽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내 스스로가 몰상식한 사회를 만드는 안개는 아니었는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불의에 붙어 자라는 악한 뿌리는 아니었는지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똥묻은 주제에 겨 묻은 사람들 흉만 실컷 봤으니 부끄럽고 부끄럽다.

최재선 한일장신대학교 인문학부 교수